우리는 왜 혐오를 이야기하는가?

최윤영 교수(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 사진: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1. 혐오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다. 


최근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혐오’가 진지한 주제로 치열하게 논의되고 있다. 혐오는 새로운 주제인 듯 보이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는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개념이고 또한 오랫동안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어왔다. 영어로는 ‘hatred’, 독일어로는 ‘Hass’의 번역어로 이해된다. 그러나 최근의 혐오 개념이나 담론은 자기보호와 진화에 긍정적 역할도 수행하는 기존의 생리적, 심리적 혐오와는 내포와 외연을 달리한다. 즉 최근의 혐오 담론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새롭게 의미화되고 문제시된 개념인 것이다. 왜 우리는 혐오를 새롭게 논의하는가? 우리 시대의 혐오 담론은 무엇이 문제인가? 미움이나 증오의 반대 극단에 사랑이 있다면 혐오의 반대 극단에는 어떤 개념이 자리하고 있는가? 


2. 혐오는 관계의 개념이다. 


혐오는 관계의 개념이다. 혐오는 혐오하는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를 가정한다. 또한 혐오의 주체와 객체는 대체로 동등하지 않은 관계에 서 있다. 혐오는 무지, 편견, 두려움에서 나오고 증오와 멸시를 담고 있으며 수치심을 조장하는 부정적 언어와 감정, 행동으로 표출된다. 한국학술정보원의 자료를 검색해보면 혐오 관련 논문은 지난 10년간 급증함을 알 수 있고, 그 제목이나 주제어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상황의 심각성뿐 아니라 혐오의 방향성, 의도성도 알 수 있다. 성소수자 혐오, 여성 혐오, 외국인 혐오, 혐한 등이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고 있고, 여기에서 혐오는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하고 있으며 성 담론이나 인종, 민족 담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혐오는 사회적, 역사적, 집단적인 개념이며 무엇보다도 타자화, 경계화, 본질화, 차별화로 이어지는 개념이다.


3. 혐오는 타자화, 경계화의 개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혐오와 관련된 (재)개념화 사례를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 혐오 Judenhass’와 ‘반셈주의 Antisemitismus’의 예이다.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이방인인 유대인(에 대한) 증오, 혐오는 유대인이 유럽에 유입된 2000년간 항상 존재해왔다. 이 증오는 다른 종교, 다른 문화, 다른 인종인 이방인에 대한 증오의 형태로 광범위하게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19세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용어가 확산되었으니 바로 ‘반셈주의’이다.


자구적으로 보면 셈족에 대한 거부를 뜻하는 이 용어는, 이전의 유대인 증오와는 강도, 차원, 맥락을 달리한다. 즉 이전의 유대인 증오와 달리 반셈주의는 생물학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개념이며 당대에 회자되던 유대인의 몸 담론에 집중한 새로운 혐오 개념이었다. 이 신조어에는 유럽 기독교인의 타자이자 이방인이었던 유대인의 삶의 역사, 그중에서도 차별사가 담겨 있다.


반셈주의는 계몽주의 이후 유대인들이 유럽의 근대의 보편적 시민문화를 점차 받아들이고 동화되자, 이제 외모나 관습, 종교, 문화로 구분하기 힘든 유대인들을 그들의 출신, 피(혈통), 인종으로 구분하고자 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미 유럽화된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과 달리 ‘태생적 유대인’으로 다시 타자화되고 경계 지워지며 새롭게 사회적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반셈주의라는 새로운 용어가 함의하는 것은 유럽인화되어오며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유대인들을 유럽 사회가 다시금 ‘빼박 유대인’으로 본질화시키고 주변부화시키는 데 있다. 이 때 많이 사용되는 대중 혐오 전략 중의 하나가 빈대, 벼룩과 같은 기생충이나 쥐떼 등에 비유하여 공포심과 두려움을 자극하고 혐오의 대상을 탈인간화시키는 동물화 전략이다. 카프카는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인간의 문화를 습득하며 동화된 원숭이 페터를 다시 동물로 규정하는 고매한 인간 학술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혐오의 극단적 종국에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 놓여있다.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이는 근대, 시민문화, 계몽 자체가 가진 도구적 이성의 근본적 한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는 혐오 문제가 사실은 결국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하는 주체와 그 사회가 가진 문제를 드러내준다. 반셈주의는 급변하는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새로운 이름을 달고 확산된 혐오 담론을 보여주었다. 현대의 혐오 담론은 오래된 엣 기표 뒤에 새로운 문제를 담아 커져 버린 우리 시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4. 혐오는 혐오하는 주체의 문제이다. 


우리 사회의 혐오는 지금 무엇을 혹은 어떤 집단을 향해 있는가? 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다른 타자로 규정하고 경계를 만들고 차별하는가? 왜 우리는 차이와 특징을 나타내는 다양한 범주들을 차별화하는 범주로 만들어 차이를 본질화하면서 우리와 구별짓는가? 크리스테바는 ‘비체’ 개념을 통하여 경계 설정을 흐트리는 다양한 존재를 향하는 혐오를 담론화한 바 있다. 앞서의 유대인 예처럼 경계가 모호한 비체들은 그러나 다시 시선을 주체로 향하게 만든다. 혐오는 주체나 주류사회의 ‘차이, 경계성, 혼종성, 교차성’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시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혐오 담론의 핵심문제는 혐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혐오하는 주체에 있다. 너스바움은 혐오를 법적, 사회적 차원에서 두려움, 수치심 등의 감정과 함께 논하면서 자신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취약성을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는 사회를 원하는 자유주의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가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논해야 한다. 부버가 이야기하듯 ‘나’와 같이 평등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엄한 존재인 ‘너’와의 관계 속에서 공통적 취약성과 차이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혐오의 극에는 공감, 존중, 공존이 자리한다. 



 

최윤영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대표저서 - 『한국문화를 쓴다』(2006), 『서양문화를 쓴다』(2009), 『카프카 유대인 몸』(2012)

대표역서 - 『이상한 물질』(2018), 『눈 속의 에튀드』(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