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혐오하는 당신들에게

소설가 김성중


세헤라자드는 여성혐오에 걸린 술탄을 향해 천 하루 동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신과 바그다드 처녀들의 목숨을 구하는 이 행위는 한편으로 술탄을 가르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르다’(무섭다), ‘모른다’(화난다)로 이어지는 술탄의 내면은 이야기꾼을 만나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우리는 도처에서 혐오의 말과 글과 눈빛과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부비트랩처럼, ‘혐오’의 네트워크가 사방에 깔려있어 경계심을 갖지 않으면 무의식중에 스며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 주관적인 ‘감정’처럼 보였던 것이, 어느덧 특정인들을 조롱하는 ‘문화’로 번져나가더니 자칫하면 폭력으로 점화될 ‘사회현상’으로 커져나간 것이 현재의 상태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사계절을 다 보낸 2020년도 끝자락에서 헤아려보아도, 이 현상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전한 환경은 혐오현상을 배양하는 온실과도 같으니까요. 여성, 장애인, 퀴어, 노인, 외국인 등등 ‘소수성’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부류를 골라 혐오감을 내보이는 것은 상황을 타개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나 자신이 뭔가 상황을 ‘통제’했다는 느낌, ‘행동’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죠. 혐오하는 대상자에게 ‘네 탓이야.’라고 투사함으로서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혐오와 폭력은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면이 있습니다. 둘 다 자신이 다수거나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소수거나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이죠. 이 둘의 특징이 ‘비겁하다’라는 겁니다. 자기보다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저지르는 행태니까요. 


적극적인 행동이자 자칫 책임도 져야 하는 폭력에 비해, 혐오의 문턱을 넘는 것은 쉽습니다. 혐오가 이토록 번성하는 것도 ‘그게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상황을 바로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어려운 일이지만 누구 하나 낙인찍어 거부감을 드러내고 몰아세우는 일은 빠르고 쉽거든요.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파시즘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장대한 스타일, 경례법과 해골무늬, 제복 등등) 가브리엘 단눈치오의 추종자, 필리포 마리네트가 쓴 미래파 선언문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청결하게 청소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전쟁, 군국주의와 애국주의, 무정부주의자의 파괴적인 행위, 목숨까지 기꺼이 던지는 아름다운 사상, 여성에 대한 경멸을 찬미하려한다.”


자, 이 기나긴 행동 강령 중 가장 실천하기 쉬운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여성혐오의 원형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전쟁, 군국주의, 애국주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지는’ 것은 무지하게 어려운 일이죠. 그에 반해 여성을 경멸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예의 저 목록 중에 여성혐오밖에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이 앞선 대의명분을 모조리 실천하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고요. 


혐오감정을 발산하는 사람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디서 그 미움을 배웠을까요? ‘모든 혐오는 자기혐오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 친구의 속마음은 아마 이럴 것입니다.


‘나는 무력해. 나약하기도 하고. 나는 안전하지 않아. 내 집이나 가족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은 그렇게 공고한 것이 아니야. 언제든 ’그들‘에 의해 흔들릴 수 있어.’

따라서 혐오 감정에 빠져있는 사람은 좀 안 된 사람들입니다. 부정적인 형태긴 하지만 이 사람들도 정열이 있습니다. 신념도 있고요. 저는 인간의 경이로움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릿속을 텅 빈 깡통처럼 비워두는 사람은 없어요.


편견이든 혐오든 가짜뉴스든 뭔가로 채워놓기 마련입니다. 부정적인 정념에 쏠려있는 사람들, 그런데 자기만의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을 성찰한다거나 뭔가를 새로 배우고 흡수하기는 싫은 사람들은 내부가 텅텅 비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텅 빈 내부에 뭔가를 채워야 하는데, 그게 세상의 슬로건이 되기가 쉬워요. ‘내가 이렇게 된 건 누구누구 때문이야’ 이렇게 적을 설정하고 그쪽을 미워하는 편을 택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좀 안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같은 혐오감정을 발산하면 어떻게 될까요? ‘눈에는 눈, 혐오에는 혐오’처럼요. 그건 그 감정에 먹혀서 상대방의 권력 아래 들어가는 겁니다. 그쪽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사람 사이에 혐오감을 조장하고 덕을 보려는 일군의 무리가 바라는 것도 이것이겠죠. 약자끼리 싸움을 붙여놓는 식으로 자신들은 책임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정치와 미디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행태죠. 


그렇다면 혐오에 빠져있는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흔한 말로 ‘손절’할 수 없는 가까운 관계, 예를 들어 가족이라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세헤라자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는 전부 죽여 버리는 폭군이었습니다. 원한에 휩싸여 있었죠. 그런 술탄에게 세헤라자드는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하반신이 돌로 변한 왕자도 있었고, 하늘을 나는 양탄자, 알라바바와 사십 인의 도둑이야기도 있었죠. 너무 재밌어서 매일 조르게 되는 이야기는 절정부분에서 끊어집니다. 다음날, 다시 이야기가 이어지기 전까지 술탄은 도둑도 되어보고 거인도 되어보고 마법사와 하릴없는 백수인 알라딘도 되어보았을 것입니다. 술탄으로 살아가면서 해보지 않았던 감정이입, 사고판단, 다양한 상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에 푹 빠진 독자에게 벌어지는 일이죠. 


흔히 사람이 마음을 돌려먹는 것을 회심(回心)이라고 하고 기적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들 얘기합니다.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혀 혐오를 발산하는 사람들, 자신의 무력을 외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이런 자들에게는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글쎄요, 천하의 세헤라자드도 천하루나 걸린 일인걸요. 


우리에게는 다른 목소리도 필요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남 탓을 하는 ‘쉬운 길’ 말고 두려움에 맞설 희망의 목소리, 더 작고 오래 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들. 우리 자신이 술탄이 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부지런히 자신을 성찰하기도 해야겠습니다. 혐오에 맞서는 것은 ‘안티혐오’가 아니라 ‘희망’ 혹은 ‘웃음’일 것이고,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쪽의 이야기가 번성하기를 한 명의 소설가로서 기원하고 있습니다.   


김성중 

소설가. <개그맨> <국경시장> <이슬라> <에디 혹은 애슐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