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 박승억(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오늘날 타인에게, 혹은 타자에게 좀 더 포용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의 요구다. 반면, 우리 주변의 위험은 날로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증오 범죄는 끊이지 않고, 테러와 군사적 분쟁도 쉼이 없다. 경제 위기에다 종말론적 기후 재앙, 나아가 방사성 물질에 대한 공포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위험들은 차고 넘친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경고한지 한 세대가 훨씬 넘었지만, 위험은 자꾸만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빠르고 더 광범위하게 ‘뉴스’를 전하는 일로 존재 의미를 찾는 새로운 미디어들은 그런 위험을 더욱 선정적이게 만든다. 그래서 낯선 이를 환대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과 자신의 안전을 위해 낯선 이를 경계해야만 하는 현실은 우리를 고뇌하게 한다.
갈등과 대립이 지배하는 현실을 타개할 방안은 타자에게 공감하고, 나아가 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공감과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오랫동안 우리는 근대 계몽주의 이성의 동일성 요청이 어떻게 폭력을 낳아 왔는지 지적해 왔고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공감과 연대의 요청은 그런 비판으로부터 나온 해법이었다. 그러나 정작 차이의 존중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해 공감과 연대는 감정의 문제인가? 아니면 이성의 문제인가?
얼핏 공감하라는 요청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누군가는 정서적 공감이 오히려 내집단을 강화함으로써 부작용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에서 누구와 먼저 손을 잡아야 할지 결정하는 일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감정적인(정서적인) 공감과 연대가 아니라 지성에 기대 상대를 ‘이해’하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차이를 존중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공감을 말할 때, 정서적 공감이든, 인지적 공감이든 ‘공감하기’ 자체가 현실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나와 타자 사이에 동일성(유사성)을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차이를 넘어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은 높은 수준의 지성적 활동이다. 예컨대 셸러나 콜나이는 단순한 정서적 공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 감정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고양된 감정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단순한 감정적 공감 그 이상의 것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서로 다른 해법들을 말하는 이론들 앞에서 우리는 실천적 딜레마와 마주한다. 실천적 딜레마는 쉬이 무기력이나 무관심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딜레마의 극복은 전적으로 개인의 실존적 선택에 맡겨져 있는 듯이 보인다. 동일성의 폭력이라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이의 존중이 유발할 수 있는 무관심에 빠지지도 않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다.
감정은 문화적으로 구성된다. 마찬가지로 차이가 매개된 동일성으로서 ‘우리’ 역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연대의 메시지는 오직 인간의 것이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과학적 사실’일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부터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연대의 요청은 오직 윤리적 도약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철저히 인간적인 것이다.
실천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단박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중재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차를 줄여가는 과정으로서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과 윤리적 명령을 매개하는 능력으로서 지성의 힘에 주목하는 것이 하나의 해법일 수 있다. 인지심리학에서 탐구해 왔듯이, 스스로 관점을 전환할 능력(perspective taking)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탁월한 지적 능력이다. 연대를 요청하는 공감은 이러한 지적 능력이 매개된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