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 예지숙 (HK연구교수)
인류세라는 용어로 현시대를 명명한지도 20여년이 지났고 미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이 급격하게 현실로 다가오면서 이에 대응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와 ‘민의 자치’, ‘민중/대중/인민의 자기 통치’의 중요성이 논의되고 있다. 인류세 시대의 역사학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현재의 환경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역사와 지질학적 시간과 진화를 포함한 더 긴 시간대의 역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지구사의 공간 범주에 행성(the planet)이라는 역사철학적 범주를 추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문학적 역사와 지질학적 역사 속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하려면 지구와 행성을 통합하면서 인간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를 고려하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기존 역사학의 문법이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촉구하는 이러한 논의들을 받아들이기 버겨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문학자 황정아의 말처럼 ‘우리에게 요구되는 변화가 가치의 전환에 버금하는 것’이라면 역사학의 인식과 태도에도 전반적이고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될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본 발표는 다소 빛이 바랬음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민중’(people/Minjung)을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 위치시킬 그러한 단초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민중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변혁운동의 주체’라 개념화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계급 동맹’에 불과하지만, 민중 개념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길고 다양하다. 개념사 연구에 의하면 민중은 1920년대에 등장하며 1930년대 초반까지 운동 담론 속에서 저항의 단위로 그려지다가 193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침체기에 돌입하였다. 1970~80년대는 민중담론의 전성시대라 할 정도로 수많은 논의가 생산되었다. 1990년대의 들어 급격하게 퇴조하는 와중에도 민중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논의는 계속되었고,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사학계에서는 민중 개념의 재구성 작업과 일상사, 구술사, 디지털 역사학 등 새로운 방법론을 통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이처럼 민중 개념을 재구성하려는 논의들을 통하여 실체론, 단일한 주체, 운동적 주체, 민족모순을 담지한 주체라는 식의 인식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으나, 민중 개념에 내재한 성장과 발전 지향성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미진하다.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지상에 묶여있는 자들(earthbounds)”이라는 브루노 라투르의 말의 말처럼 인간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면서도 인간 이상의 역사서술의 대리인(agent)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민중 개념에 있어 과감함 확장의 필요할 듯하며 시인 김지하가 언급하였듯이 ‘인간을 비롯하여 다른 생명체와 사물까지를 포함하는 시각을 가져보는 것, 이를 위해서 수탈당하는 생명 전반을 민중이라 칭해보는 것’도 시각 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