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 장애와 혐오스러운 기계


이재준(숙명인문학연구소 HK조교수)


  지난 봄 일본 후쿠오카에는 상상의 기념비 하나가 세워졌다. 높이가 대략 20미터, 무게는 80톤. ‘건담’ 조형물이다. 도쿄의 오다이바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고베에도 그에 못지않은 ‘철인28호’가 있다. 영웅 서사가 사라진 요즘, 보기 드문 거대 조형물이다.


그런데 이 모든 기계에는 우리에겐 잊힌 어떤 ‘결핍’이 있다. ‘철인28호’는 패전의 현실인 거대 폭격기 B-29의 다른 이름이다. ‘건담’은 폐허가 된 지구를 버리고 우주로 떠난 인류의 고난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심지어 ‘도라에몽’은 주인공이 망쳐놓은 미래를 보상하려 현재라는 과거로 귀환한 로봇이다. 스펙터클한 문화자본의 풍경에서 상상의 기념비들은 숭고한 크기와 위력을 뽐내며 현실이 된다. 돈의 회로를 팽팽 돌리며 은폐한 결핍은 미래의 과거일 것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일 무렵 대전 한국과학기술원에서는 외골격 로봇 수트를 착용한 두 사람이 클러치를 움켜쥔 채 진땀을 흘리며 험지를 통과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넘어지듯 결승선을 가로지른다. 로봇 수트를 완벽히 조종해냈고, 최소 시간으로 경기를 무사히 주파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당당히 ‘파일럿’이라고 불렀다. ‘건담’ 조종사처럼 말이다.


파일럿들이 최선을 다한 곳은 사이배슬론(Cybathlon)이다. 사이배슬론은 사이버네틱스와 애슬레틱스(각각의 그리스 어원은 ‘kybernetes’와 ‘athlon’)이 결합된 신조어다. 주로 척수 신경 손상을 지닌 사람을 위한 첨단 기술들이 경합을 벌인다. 얼핏 패럴림픽과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 패럴림픽의 목표는 손상된 몸을 가진 이들에게 그렇지 않은 이들 못지않은 삶을 살도록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온전한 몸’의 이념은 ‘건강한 몸과 정신’의 패럴림픽 버전이다. 선수들은 이것을 위해 경쟁한다. 그래서 패럴림픽 선수의 손상된 몸이 기계로 보충될 수는 있어도, 그 기계가 인간적인 몸들의 경쟁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몸 이외의 비인간들로 보충하는 것은 반드시 제약된다. 반면 사이배슬론은 ‘온전한 몸’을 고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적 몸의 순수성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몸의 운동 기능에 관심을 기울인다.


경합에서 권장되는 사이버네틱 기술들은 손상된 운동 기능을 최대한 보충하려 한다. 그래서 사이배슬론은 손상된 몸의 운동 능력과 보충 기술 양쪽의 경합이다. 그 결과 기계와 결합한 몸이 살과 뼈의 순수성 대신에 더 잘 운동할 수 있는 능력으로, 즉 몸의 증강된 운동 능력으로 온전하지 못한 몸의 결핍을 메우는 듯하다.


사람들은 이런 사이배슬론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고성능 기계가 장애인의 자율성을 위협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거추장스럽고 보기 흉한 기계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도, 이동을 위해서나 다른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것에 의존해야 하는 게 장애인의 현실이다. ‘의존해서는 안 되지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주인/노예의 논리가 인간과 기계의 이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말하자면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지만, 노예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그래서 주인은 노예에게 이중 잣대를 사용한다. 기계는 매우 잘 작동해야 하고, 그 작동은 주인의 소유여야 한다. 반면 작동하는 기계 자체는 언제 버려도 그만인 존재로 취급한다. ‘장애’의 극복을 바라는 ‘재활’은 이 기계 의존성을 적극적으로 제약한다. 첨단 재활의공학을 시험하는 사이배슬론에서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파일럿’이라 부른 이유를 이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보충 기술을 능숙히 잘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기계 비인간을 지배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기계를 완벽히 조종한다면 의존성이 아니라 자율성이 보전된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요즘 기계들은 작동을 스스로 생성할 줄도 안다.


그런데 사이배슬론에서 이 윤리적 긴장은 또 다른 방향으로도 표출된다. 손상된 몸을 기계로 보충하려 할 때마다 운동 기능은 보완되지만 그럴수록 ‘몸의 순수성’은 훼손된다. 몸에 남은 훼손의 흔적과 흠결은 지워지고 멀리 밀려난다. 순수성은 희생양 신화의 계보를 잇는 인간주의적 열망의 요소이다. 사이배슬론에 녹아든 인간주의는 훼손된 몸을 부정하고 거부하며 멀리 밀어내려는 자기로 향한 혐오 정동의 잠재성을 실현한다. 몸에 보충된 비본래적인 존재인 기계에 대한 혐오도 이것에 뒤섞인다.


이와 달리 이런 혐오 상황은 어떤 횡단성 내지는 변형의 증거가 아닐까? 사이배슬론의 8가지 종목이 아우르는 기술들은 모두 절단되었거나 마비된 몸과 기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이버네틱스이다. 이것은 손상된 몸의 일부 근육이 발신하는 전자적 신호를 기계적으로 감각하고 증폭하여 이것을 패턴으로 정제해서 크고 작은 모터를 구동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렇게 해서 로봇 다리가 움직이고 로봇 팔이 움직인다. 


하지만 신경 손상을 입은 근육의 신호는 대부분 섬세하지 못하므로 상당 부분 로봇 자체의 기계 센싱과 학습에 의존한다. 로봇은 스스로 더 정교하게 손상된 몸 일부와 외부 환경을 인식하여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몸에 보충된 기계들은 더욱 자율적인 기계로 변한다. 

그래서 결국 걷는다는 것, 잡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존재의 횡단하는 신호 양상들의 효과가 된다. 여기서는 제어와 통제가 아니라 상호의존성 내지는 횡단성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논리에서라면 이제 장애를 규정하는 손상이란 사실상 결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무언가와 마주칠 때마다 계속 이루어지는 몸의 변화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는 실재론의 소박한 눈높이를 겨우 극복한 인간주의가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기계를 잘 통제하라고 명령하면서 증강된 몸에 자긍심을 느끼라고 말하는 위선에서 벗어나는 길처럼 보인다. 


장애학자인 댄 구들리(Dan Goodley)가 생각하는 포스트휴먼의 조건처럼 말이다. 그를 포함해서 일군의 비판적인 장애학은 손상과 장애를 물질적 요소들과 함께 분절된 사회적 구성물로 보려 한다.


나는 이것 말고도 바로 여기서 우리가 인간 너머의 타자성이 개방되는 어떤 어두운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보자. 이 포스트휴먼적인 횡단을 감행하게 한 불가피한 조건인 척수 손상이 있다. 그것은 크든 작든 감각 저하와 마비를 가져오고, 일어서고, 걷고, 잡고, 달리는 거의 모든 인간적 움직임에서 예전과는 다른 경험을 낳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경험의 대부분이 고통과 좌절로 채워진다고 손상을 겪는 이들은 말한다. 게다가 내 몸이 그런 상태가 아닌 한, 우리는 결코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 앞에서는 말이 사라진다! 그뿐만 아니다. 만일 절단되고 남은 팔 근육의 세포들과 프로스테시스 로봇 센서들이 상호 작용하는 비좁은 장소가 있다면 그곳 역시 캄캄한 밤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곳은 장애를 지닌 이들이 고통과 혐오 속에서 ‘알 수 없는’ 비인간 타자를 만나는 포스트휴먼의 장소이다.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나는 너를 안다. (너를 지배한다)’는 오만함 따위는 힘을 잃는다. 우리는 후쿠오카에 설치된 상상의 기념비에서가 아니라 바로 장애와 접속한 기계들로부터 포스트휴먼-되기와 비인간을 조금 더 진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상단사진출처: 사이배슬론 공식사이트 https://cybathlon.ethz.ch/en)












이재준

숙명인문학연구소 HK조교수

대표저서 - 『초연결시대 이질성 문화 양상』(2021, 공저)

대표논문 - 「혐오의 정동」(2021), 「아브젝트, 혐오와 이질성의 미학」(2021), 

「단단한 생명 혹은 흐르는 물질」(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