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신(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동물연구와 포스트휴머니즘의 조합을 통해 인간-동물 관계를 새로이 고민하고,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에서 탈피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연구 과정의 하나로 준비된 본 강연은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1.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는가? 동물은 이 세계에 어떤 존재일까?
2. 더 나은 세계는 어떤 모습일가? 동물에게도 더 나은 세계일까?
3. 인간-동물 관계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우선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는 질문에는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물론 인류역사에 갖가지 이유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 적은 많았지만 21세기는 또 다른 의미, 즉 인류역사라는 틀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세계로 여겨진다. 20세기 후반 생명공학의 급격한 발달이 인류라는 태생적 종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 결과 인간존엄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하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포스트휴먼 미래”를 얘기했다.
폴 크루첸에 의해 널리 알려진 ‘인류세’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 근거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확인했고, 디페시 챠크라바티로 대표되는 ‘기후위기’ 논의는 이전의 ‘글로벌’한 태도가 아닌 새로운 ‘행성적’ 태도로 세상을 직면해야 함을 강조한다. 반면 제이슨 무어는 이러한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지목하며 ‘자본세’로 지금의 세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도나 해러웨이는 이처럼 하나의 큰 서사로 문제를 그리면서 하나의 해결책으로 미래가 수렴되는 경향을 비판하며 현재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양하게 다루어한다는 입장에서 ‘툴루세’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세계를 설명한다.
이처럼 다양한 의견에 공통적인 점은 바로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한 논의에서 해러웨이를 제외하고는 동물에 관심을 두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기후위기나 인류세 논의에서 동물을 포함한 자연 전반이 겪는 심각한 피해를 고민하지만, 많은 경우 인간 대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따르기에 다양한 방식이 결어된 채 다루어지곤 한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새롭지만 분명 좋지 않은 세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더 나은 세계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동물에게도 나은 세계일지는 의문이다. 지금 세계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 상당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동물과 비인간 존재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더 나은 세계는 또 다른 인간중심주의적 세계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결과적으로 현 세계의 문제를 또다시 경험할 것이다.
동물에게도 더 나은 세계, 즉 인간-동물 관계라는 틀에서 더 나은 세계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 강연자는 “Indifference: An Imperative of Posthuman Life”라는 최근 논문에서 ‘무관심’을 그 세계의 성격으로 규정했다. 현재 대부분의 동물연구 및 동물권 운동에서 대응, 관심, 돌봄 등이 강조되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의 의해 피해를 입은 동물이 많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은 현실적으로 모든 동물에 적용될 수 없고, 영속적으로 지속될 수도 없다. 언젠가는 그러한 방식이 필요없는, 그래서 동물들과 서로 무관심한 관계가 기본이 되는 세계를 목표를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본 강연은 그러한 목표를 지향하는 인간-동물 관계가 어떤 것일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무관심한 존재,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존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존재가 아닌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존재와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여전히 존재들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각각의 존재에게 지시를 하는 무언가를 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무언가’를 ‘요소’라는 말로 설명하는 알폰소 링기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한 존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는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