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관점에 서보기 그리고 상상력


박승억(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세계를 논리적으로 우아하게 설명하고 싶었던 17세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는 복잡한 세계를 설명하는 단순하지만 정교한 그림을 그려 보였다. 그는 세계를 이루는 가장 단순한 실체를 상정하고, 그 실체에 모나드(monad)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나드거나 모나드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모나드는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를 반영한다. 미적분을 발명한 사람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사고 실험이었다. 


  모나드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를 반영한다는 이야기에서 단박에 우리는 서로 다른 모나드에 비친 세계는 다른 세계들인가 되물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세계는 무한히 많은 세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일 것이다. 하나 안에 서로 다른 여럿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대답은 이렇다: 


“한 도시를 여러 면에서 관찰하면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보여 마치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도시처럼 보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무한히 많은 단순 실체들을 통해 무한히 많은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각각의 모나드가 자기만의 관점을 가진 탓에 하나의 우주가 여러 모습으로 보이는 것뿐이다.” (Monadologie, §57)


  라이프니츠의 이 비유를 구현한 곤충이 있다. 무시무시한 사냥꾼인 잠자리는 2만 개가 훨씬 넘는 낱눈을 모은 겹눈으로 사냥할 대상을 포착한다. 각각의 낱눈은 각각의 관점을 갖는다. 그 낱눈들의 유기적인 협업이 잠자리를 창공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만약 그 낱눈들이 각자 자신만의 관점을 고집했다면 잠자리는 일찌감치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요즘처럼 독창성이 경쟁력인 세상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권장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주체성을 중시한 나머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도리어 커다란 결핍이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관점도 끌어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눈을 가진 인간은 어떻게 다른 관점을 자신 안에 가질 수 있을까? 관점이라는 말에는 그 관점에 상응하는 시야가 있고, 그 시야를 벗어나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관점은 그래서 아주 인간적인 개념이다. 물론 그런 타고난 제약을 넘어설 해법이 없지는 않다. 


  비록 눈은 모자라지만 인간에게는 관점을 변경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특히 상상력은 그런 자유를 증폭시킨다. 상상력은 주어진 것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단순히 위치를 조정하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해 준다. 인간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고, 자신과는 관점과 시야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협력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그 상상력 때문은 아닐까? 비록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이 불안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타고난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대가로는 남는 장사가 틀림없다. 그러면 언제 상상력이 잘 작동할까?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포기할 때다. 당연하다는 생각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기 때문이다.











박승억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


최근 논문으로는 「현상학적 사회공학:후설 현상학의 실천적 모색」(2024),

주요 저서로는 『가치전쟁』(2020), 『학문의 진화』(201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