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차 월례발표회
초주체에서 저주체로

발제 : 정현규(공동연구원)

  

  티머시 모턴과 도미닉 보이어는 공동으로『저작한』『저주체』에서 새로운 주체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인간 주체의 초월성을 한없이 드높이려는 이제까지의 기획에서 벗어나려는 이 노력은, 먼저 초주체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할 때 그 면모가 드러난다. 초주체란 세계를 초객체적 시대, 예를 들면 지구 온난화나 항생제, 플라스틱 봉투나 자본주의가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시대를 초래한 전형적 백인, 남성, 북부의 인간, 영양상태가 좋고, 모든 의미에서 근대적 인간을 지칭한다. 그들은 명령하고 통제하며, 초월을 추구하고, 자신의 지배력을 자가 공급하며 거기에 심하게 도취된 존재들이다. 


  반면 저주체는 초월이 아니라 ‘저월’하는 존재로서, 다면적이고 다원적이며, 아직-아님이고, 여기도 저기도 아니며, 부분의 합보다 작다. 저주체는 필연적으로 페미니즘적이고 반인종차별주의적이며, 다인종적이고, 퀴어적이며, 생태적이고, 트랜스휴먼이자 인트라휴먼이다. 뿐만 아니라 저주체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벌레나 돌고래와 같은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인간이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덩어리라는 환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른 존재자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고 다른 존재자들에 민감하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시도가 필요할 따름이다. 


  그다음엔? 저주체로서의 우리는 ‘너무’ 빨리 시작함으로써, 초월과 이를 이루기 위한 정치적인 것의 집행 연기에 저항해야 한다. 완전히 이해된 목표와 적절한 계획을 가진 특출한 구세주를 고대하는 것은 현 체제를 연장하려는 시도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저 시행착오를 거치며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저주체들의 정치적 기획은 조직적이고 투명한 강제된 움직임이 아니라, 내부에서 파열음을 일으키며 게임하듯 유희하는 것이 필요하다. 게임하기는 판타지와 실험을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규모와 위상과 소재를 넘나들며 작동하는 상상력의 훈련을 위한 장소이며, 저주체가 자기 능력을 배우고 확장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