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에서 생각하는 혐오와 연대


김지영(숙명인문학연구소  HK교수) 


  지난 해 4월 30일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에 우토로평화기념관(ウトロ平和祈念館)이 문을 열었다. 개관한지 반년 만에 방문자 9000명을 기록하며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우토로는 재일코리안 집단거주지 중의 하나이다. 국내에서는 2015년 인기 TV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재외동포특집 방영을 계기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우토로 마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토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일본이 늪지에 군용비행장 건설을 시작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당시 조선에서 넘어온 노무자 1300여 명이 간이 합숙소인 함바에 생활하면서 건설 노동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적절한 보상 없이 그곳에 방치되었고, 그중 일부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일본에 잔류하면서 현재의 우토로 마을이라는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강제징용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제국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의 역사 속에서 강요된 이주였다. 


  우토로의 조선인들에게 1945년 종전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임과 동시에 실업자로의 전락을 의미했다. 전후 재일코리안들은 일본의 사회보장으로부터 배제되었고, 우토로 사람들은 가혹한 차별과 극심한 빈곤을 겪으며 살아왔다.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룬 후에도 우토로는 토지소유권자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상하수도 인프라조차 정비되지 않았기에 비가 오면 가옥이 침수되어 오물이 넘쳤고, 1980년대까지 수도조차 연결되지 않아 주민들은 우물물로 생활해야만 했다. 그런 우토로 마을을 인근 지역 주민들은 백안시했고, 우토로의 주민들은 혐오와 낙인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우토로 마을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일본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차별의 상징으로 굳어져 갔다. 


  우토로에 일본 시민들이 드나들게 된 건 1980년대부터이다. 우토로 마을의 실태를 알게 된 일부 일본 시민들이 이를 심각한 인권문제로 인식해 1986년부터 우토로 주민들과 힘을 합쳐 마을의 생활 여건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1988년 수도매립공사가 착수되었지만, 우토로 토지 소유주인 기업 닛산이 주민들 몰래 토지를 매각하면서 주민들은 정착해온 땅에서 강제철거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토지재판이 진행되면서 마을 곳곳에는 검고 붉은 글씨로 투쟁적인 문구가 적힌 입간판이 세워졌다. 


  “강제퇴거 결사반대” 

  “당신들에게 정의가 있습니까”

  “우리는 우토로에 살고, 우토로에서 죽습니다”.  


  우토로 마을의 역사성은 지워진 채 그저 ‘토지 소유권’ 분쟁으로만 치부된 토지소송은 처음부터 주민들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강제철거 위기에 직면한 우토로 주민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전기가 찾아온다. 199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활동가와 시민 사회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주민들의 퇴거를 명령한 것을 계기로 한·일 양국에서 우토로 주민들을 돕기 위한 대책위가 결성됐다. 이후 일본의 시민단체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과 한국 시민단체 ‘우토로국제대책회의’의 지원활동에 힘입어 우토로 문제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연착륙으로 평가되는 결착을 보게 된다. 한국 시민 사회의 모금과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토지 일부를 다시 사들인 뒤 우지시가 공공주택을 짓기로 하면서 퇴거 문제가 해결됐고, 마을의 역사를 담은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도 결정됐다. 


  이는 일본 최고재판소가 내린 강제퇴거 결정을 한일 시민 연대의 힘으로 실질적으로 뒤엎어 보인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받지만, 일본 정부와 기업의 과거청산과 전후보상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겨졌다. 재일코리안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폭력은 언제든 다른 형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2021년 8월 30일에 발생한 우토로 방화사건이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화재로 인해 주택 7채가 불타고 평화기념관에 전시 예정이었던 입간판과 생활용품들이 소진되었다. 범행을 저지른 23세 일본인 청년은 앞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아이치현 본부와 나고야 한국학교 시설에 불을 지른 혐의로도 기소된 바 있는 인물이었다. 피고는 모든 기소내용을 인정하고 한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이 있었으며, 재일코리안에게 공포감을 줘서 몰아내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고 범행의 동기를 진술했다. 재일코리안을 겨냥한 명백한 증오범죄였다. 


  검찰 측은 징역 4년을 구형했고, 변호 측은 정상참작을 요구했다. 재판의 쟁점은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적대와 차별 감정이 양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여부였다. 2022년 8월 30일에 내려진 판결에서 마스다 게이스케 재판장은 “재일코리안을 대상으로 한 편견이나 악감정에서 비롯한 폭력적 행위”라고 사건을 평가하고, 피고에게 4년 실형을 선고했다. 일본의 형법에는 증오범죄를 별도로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재일코리안에 대한 차별적 범행 동기는 실질적으로 양형에는 반영되었지만, 판결문에 이 사건을 ‘차별’과 ‘증오범죄’로 명확히 규정하는 발언은 포함되지 않았다. 


  작년 우토로평화기념관을 찾은 어느 재일코리안 여성은 눈물을 내비치며, “지금 마침 나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토로 방화사건이 뮌헨에서 있었던 ‘크리스탈나흐트(Kristalnacht)’의 시작이 아니라면 좋겠는데요”라고 우려를 표하고, “이 기념관이 그러한 시작을 막기 위한 기념관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전했다고 한다. ‘평화기념관’이라는 명칭에는 평화를 염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기념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강요로 많은 희생을 치른 오키나와현의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방문해 혐오에 저항하는 연대의 거점이 되고 있다. 


  지금 일본 사회는 혐오 세력과 이에 맞서는 시민들의 연대가 맞부딪치고 있다. 상황은 엄중하지만 우토로의 역사를 돌아볼 때 혐오가 있는 곳에 저항과 연대도 있어왔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올해는 조선인 학살이 있었던 관동대지진으로부터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우토로는 기억 투쟁의 현장이자 혐오에 대항하는 시민 연대의 산증인으로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숙명인문학연구소 HK교수

대표저서 - 『日本文学の〈戦後〉と変奏される〈アメリカ〉-占領から文化冷戦の時代へ』 (2019)

- 『냉전 아시아와 오키나와라는 물음』 (공저, 2022)

대표논문 - 「여성 없는 민주주의와 ‘K-페미니즘’ 문학의 경계 넘기: 일본에서의 『82년생 김지영』 번역수용 현상을 중심으로」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