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고향을 잃은 사람들


유수정 (숙명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한국의 다도해만큼이나 아름다운 일본 세토내해에 면한 다카마쓰항에서 배로 20분 남짓 가면 오시마라는 작은 섬에 닿는다. 섬 한 바퀴를 도는 데 40분이 걸리지 않는 아담한 섬이다. 이곳은 섬 전체가 오시마청송원(大島青松園)이라는 한센인 요양시설로 1909년에 개소하여 한때는 최대 860명의 입소자가 있었다고 한다.


2018년에는 50명이었다. 평소 외부인의 출입이 드문 곳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이방인을 위해 직원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리쬐는 태양과 습한 바다 바람으로 더운 날씨 탓인지 섬에 머문 1시간 동안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관리동을 나와 병동, 자치회 사무소, 교회와 절, 신사를 지나 푸른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언덕 위 청동빛 지붕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납골당이었다.


일반인은 출입이 안 되는 곳이었지만 직원은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어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둥근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유골함. 한센병 요양소 입소 후 끝내 퇴원하지 못하고 요양소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유골함 아래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만, 본명이 아니었다. 한센병이 확진되고 요양소로 격리되는 과정에서 그들은 본명이 아닌 이름으로 가족과의 관계를 끊어냈다. 중간중간 빈 자리는 나중에 가족이 유골을 수습해 간 분들이라는데 눈으로 금방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 이분은 한국 출신입니다. 이분도. 이분도.

몇 개의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해준다. 이방인에게 자물쇠를 열어준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아마도 처음으로 그들의 고국에서 찾아온 방문객은 조용히 묵념했다. 


이름을 잃은 사람들.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대학원에서 발행하는 독립 언론 《단비뉴스》가 한센인 정착촌의 주거실태를 고발한 2021년 12월의 탐사취재 기사에서도 기사에 등장하는 한센인의 이름은 가명을 썼다. 기사에는 “그들은 낯선 사람을 매우 경계했다. 기사에 등장하는 한센인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나이와 성별, 가구원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주민이 동의한 경우에만 썼다”는 취재원 보호를 위한 문구가 반복됐다. 오랜 세월 낙인과 차별을 받아 온 한센인들의 선택일 것이다.


한센인들이 잃은 것은 이름만이 아니다. 13개의 국립요양소와 2개의 사립요양소를 유지하며 사회 복귀를 희망하는 한센인들의 복귀를 지원하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한센인 정착촌을 만들어 '절반의 복귀, 절반의 격리'를 하였고, 이를 통해 한센인 비가시화에 성공했다. 사실상 한센인 정착사업의 목적은 경제적으로 시설 운영 비용을 줄이고 토지 개간의 효과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한센인은 스스로 자활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받으며 방치되었고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한센병은 퇴치가 완료된 질병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센인들의 복귀’는 멀어지고 있다. 한센인들이 고령화되면서, 차별로 고통받고 고향 복귀를 염원하던 그들의 역사도 잊혀지고 있다. 정착촌의 소득을 책임지던 축산업은 쇠락하고, 슬레이트 지붕의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인해 한센인 정착촌은 점차 소멸하고 있다. 1980년대 100개였던 정착촌은 2020년 현재 전국에 82개가 있다. 


오시마청송원의 납골당에는 50칸 정도의 빈자리가 있었다. 2018년 현재 평균 연령 85세의 입소자들을 위한 자리이다. 한센병 당사자이자 일본 한센병 운동의 오피니언리더였던 소설가 시마 히로시가 소설 「기묘한 나라」에서 말했던 ‘이 나라(한센병 요양소)의 유일한 대이상’인 ‘멸망’이 다가온 것이다. 절멸이라는 결말로 차별과 혐오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고 잊혀지게 될까.


이름과 고향을 잃고 철저하게 비가시화된 한센인들의 역사는 이 사회에서 가려진 무수히 많은 소수자들의 그것이 아닐까.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니 오시마 언덕에서 바라보던 끝도 없는 푸른 바다가 떠오른다.








유수정

숙명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대표논문-사가미하라 장애인시설 살해사건과 헨미 요의 『달』(2023)

우시지마 하루코의 「여자」에서 보는 ‘대동아’의 모성(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