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위기


하홍규(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오늘도 부고(訃告)를 받았다. 이메일을 통해서든 문자를 통해서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늘 부고를 받게 되기에 부고를 받는 것은 내 나이쯤 된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오늘은 부고를 받고 나서 너무나 놀랐다. 오래전 나의 학부 강의를 맨 앞자리에서 들었고,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지금은 박사 학위 논문을 마쳐가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학생의 본인상(喪)이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내일이 발인이라고 하니, 오늘 장례식장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 소식에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물론 적당히 조의금을 내고 문상(問喪)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무언가 더 해야 할 것이(의무)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죽음이 위기에 처해 있다. 죽게 할 수 있는 위험이 곳곳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죽음의 위기’라는 말로 우리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능력을 상실한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죽음을 다루는 능력이 부재한 사회는 공동체를 지킬 능력의 부재를 보여줌에 다름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 성원의 죽음을 다루는 능력이 부재한 것을 어떠한 문제 상황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나아가 죽음으로 와해된 사회관계를 다룰 능력을 상실했음에도 그 상실에 대해 우리는 무감각하다(죽음 의례는 공동체 회복의 기제였다). 왜냐하면 이제는 돈만 지불하면 기업이 죽음을 대신 다뤄주기 때문이다. ‘죽음의 상업화’이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1697년 프코 드 산타 마리아라는 포르투갈 수도승이 쓴 글을 인용하는데, 오늘날에도 너무나 적절하게 들린다. “어제 장례에 참석했던 사람이 오늘 무덤에 묻힌다....연민마저 위험한 것이기에 친구에 대한 연민도 표하지 못한다.” 어제도 누군가 죽고, 오늘도 누군가 죽고, 내일도 누군가 죽을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지라르는 ‘문화의 무차별화’에 대한 말한다.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사회에서는 현실의 다양성과 차이를 부여하는 교환체계(문화)로 차이가 생겨난다. 선물은 교환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교환이다. 선물이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 주고 받기’가 실은 ‘교환’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감춰야 한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교환체계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상호성을 감춘다. 그런데 상호성을 감추지 못할 때 문화는 사라진다. 문화적인 것이 소멸된 사회에서는 모든 죽음을 무차별적으로, 순수한 물물교환으로 동일하게 다룬다. 죽음의 상업화는 문화의 소멸이다. 


죽음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나면, 더 이상의 질문은 할 수가 없다. 어제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남편은 물론이고) 열 살짜리 아들은 어떤 질문을 던지게 될지 모르겠다. 304명의 공동체 성원이 한꺼번에 죽었던 세월호 참사 때 정부는 이를 사고사로 처리하고 보상으로 종결하려고 시도했다. 음식을 끊고 왜 내 아이가 죽었는지 질문하는 부모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한 혐오스러운 존재들도 있었다. 159명의 공동체 성원이 한꺼번에 죽었던 이태원 참사 때 정부는 희생자의 이름도 영정도 없이 애도하게 했다. ‘죽음의 무차별화’이다. 그리고 어떠한 질문도 하지 못하게 했다. 죽음의 위기는 사회의 해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징후이다. 












최근 논문으로는 「시각과 혐오」(2023), 「혐오의 현상학: 감정과 가치에 대한 아우렐 콜나이의 접근」(2023), 「배제된 죽음, 가치 상실, 노인 혐오」(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