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재미, 그리고 혐오 사이

 이승훈(기초교양학부 교수)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tvN 드라마 <환혼 2: 빛과 그림자>에서 나온 대사라고 한다. 어떤 대학의 교수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 대사를 인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능력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포용과 공존의 문제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으며, 그 이유와 정당성을 설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의 생존도 어려운 상황에 왜 다른 사람의 안위를 배려해야 하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얼마 전 ‘남자 고등학교 극우화’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학벌주의, 인종 혐오, 반페미니즘. 북한과 중국에 대한 증오 등 남자 고등학생들의 가치관이 위험하다고 했다. 아직 숫자로는 소수일지 모르지만, “요란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게 될 거라는 우려였다. 정말 그러한지 궁금해서, 현재 고등학교 다니는 한 학생에게 기사를 보여주고 의견을 물었다. 그의 반응은 기사에 내용에 대해서 대체로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두 가지 점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했다. 하나는 혐오 발언을 하는 학생들이 ‘요란한 소수’가 아니라 이미 대다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들의 혐오 대상이 공산주의나 페미니즘처럼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페미니즘이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고, 의미도 모른다. 그저 재미로 낄낄거리며 특정 대상에 향한 혐오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이 시대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돈 많이 버는 것”과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돈과 재미는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자신 외 다른 모든 가치들을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돈과 재미 앞에서 정의와 연대의 가치를 주장하면 유난을 떤다며 눈총을 받거나 PC주의라며 조롱받게 된다. 


하지만 돈과 재미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돈은 경쟁에서 탈락한 약자를 배제하며, 재미는 혐오와 쉽게 이어진다. 윌리엄 해즐릿은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증오에 물리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농축된 악의처럼 잘 보존되는 것도 없다”고 말한다. 사랑은 조금만 지나도 무관심이나 역겨움으로 변하지만, 혐오는 죽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신주의와 재미 지상주의가 극우화로 치닫는 징검다리라는 기자의 걱정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미래 사회의 합리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서 고민한다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는 명확한 것 같다. 돈과 재미, 그리고 혐오의 이 공모 관계를 깨는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최근 논문으로 “개인화 시대, 연대의 조건: 아담 스미스의 ‘동감’ 개념을 중심으로,”(2025) “한국 보수 개신교의 혐오 정치,”(2024)  “혐오에서 연대로: 영화 ‘버든’에서 읽는 새로운 가치의 탄생”(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