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예지숙 (HK 연구교수)
‘일정한 직업이나 거주가 없는 사람’이라는 정의는 사실상 부랑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곤경에 빠지게 하는데, 이 글에서는 1930년대의 시기적 상황 속에서 대두된 빈곤문제를 중심으로 부랑인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당국의 대책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대한민국 정부의 부랑인 대응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빈곤, 장애, 질병 노인 등의 혐오 현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구제의 대상이었던 걸인, 이재민, 고아 등의 빈민은 1912년에 단속이 시작되면서 태만자,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었다. 단속이 시작될 때 식민지 조선의 부랑집단은 부랑청년이라 불린 구시대의 상류층들을 포함한 걸인, 이재민, 고아, 한센병인, 각종 중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대공황과 식민지 공업화를 배경으로 하여 실업노동자이며 도시 최하층의 빈민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도시의 중심부에 형성된 구직시장을 근처를 배회하거나 넝마주이로 생계를 잇거나 구걸을 하면서 살아갔다. 1930년대 이후 부랑자 대책에는 사회사업(복지)와 경찰이 개입하였으며 서서히 단속과 수용이 결합되었다.
본고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1930년대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조선총독부의 정책 대상은 주로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경성부가 1931년에 설립한 사회사업 시설인 경성부간이수산장(京城府簡易授産場)에는 14세~25세까지 서당이나 보통학교의 문턱을 밟아본 사람들이 수용되었다. 경성부는 수산장에 간단한 기계 설비를 마련하여 수용자들에게 직업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수익은 강제저축을 시켰다. 이는 나태하고 노동하기를 싫어한다고 여겨진 부랑자를 갱생 즉 노동자로 재생하는 과정이었다.
갱생의 과정은 기술을 얻고 저축을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정신과 몸을 만드는 것에서 완성되었다. 수산장 즉 부랑자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수산과 갱생’은 일제의 빈민관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며 조선총독부가 도입한 사회사업도 타민관(惰民觀)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타민관은 일본의 역사 경험 속에서 나온 민중관이었다. 이에 다르면 구제는 게으른 민중을 양성하기 때문에 구제를 최소화하여 스스로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경성부간이수산장에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즉 수산장의 목적은 부랑자를 노동하는 인간으로 갱생(更生)하는 것으로 노동교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경성부 수산장은 이후 광주 목포, 전주 등에서 설립된 부랑자 수용시설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부랑자 수용과 사회복지의 관계를 살펴보자. 1930년대에 시도된 수용시설들은 모두 부라는 지방행정기관이 사회사업으로 만든 것이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보이듯이 부유하는 집단을 시설 수용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한국 사회복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본 연구는 이러한 특징이 1930년대 이래에 운영된 부랑자 시설에서 나타났다고 보았다. 따라서 20세기 한국에서 나타난 부랑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대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초기 국면에 대하여 경로 의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일제시기에 사회사업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부랑자 수용은 조선총독부의 사회사업은 재정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조선인을 교정하고 개조하는 것을 향하고 있었는데 부랑자 수용에도 타민관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논리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개발주의 시대에 사회정책에도 스며들어가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일제 시기 사회사업 연구가 탈식민의 과제와도 맞닿아 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