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진(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컴퓨터가 고장 나 애를 먹다.” 영어로는 “The computer is acting on me!” 이 말이 새삼 흥미진 이유는 사물의 행위성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진 현실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평소에는 우리에게 가려져 있던 ‘망치’의 실재를 퍼뜩 다시 지각하게 되는 것은 오직 망치가 망가질 때라고 얘기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망치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우리에게 긴밀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말에서도 “이 전선줄이 여간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네” 하지 않나. 우리의 경험 언어가 우리의 원래 사고방식을 전해준다.
‘반려감(伴侶感)’. 벌써 3년 전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 부사장이 운영하는 생활변화관측소가 제시한 단어였다. ‘반려견, 반려식물에 이어 급기야 반려 가전도 나왔다. 피곤에 지친 우리를 대신해 묵묵하고 한결같이 제 자리에서 할 일을 해주는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를 써본 사람은 안다. 때로는 이들이 우리 삶에 진정 고마운 반려자라는 것을. 마케팅 회사들은 동식물을 넘어 딱딱한 물성을 가진 기계에도 이름을 불러줄 때 반응하거나 눈을 깜박거리게 만들고 있다. 어찌 보면 섬뜩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는 동식물을 넘어 벌써 ‘사물’로 가고 있음은 역시 분명하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각종 ‘이인(異人)’들은 통념에 부합하지 않고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으며 인간과 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해방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생사를 뛰어넘는 존재들로 외계인으로, 도깨비로, 주모酒母 귀신으로, 저승차사로, 괴물로 둔갑한다. 하늘이 그들에게 힘을 점지한 이유는 그들이 가진 원통함을 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늘의 힘을 빌리는 통로는 의외로 다른 사물과의 연대를 통해서다. 특히 도깨비 김신의 검과 별 그대 천송이의 비녀는 그 모든 세월을 함께한 물질적 기억이다. 그 사물들 역시 인간만큼이나 해원(解冤)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우리에게 이 개념이 익숙하고 오랫동안 사물의 행위를 인정하는 언어를 써왔다 해도, 최근까지 사물의 행위성 관련한 담론과 실천으로 가장 인기를 누린 이는 프랑스 과학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1947-2022)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하다. (사변적 실재론자 그레이엄 하먼은 약간 질투 어린 시선으로 그의 책 서문에서 이를 지적했다.) 또 라투르는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철학 사조인 신유물론, 객체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생태주의를 포괄하고, 이 사조에 영향을 끼친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 질 들뢰즈의 내재성(immanence) 개념과 존재의 일의성(univocity) 개념, 그리고 미셸 셰르의 매개의 존재론 등을 모두 참고한 소위, 근대성 비판 사유의 거대한 저수지라 칭할 만하다. 가장 중요하게 라투르는 꽤 유쾌하다. 그의 글은 유머러스하고 역동적이어서, 또 논쟁적이다. 그는 성서주석학을 공부한 카톨릭 신자이고, 군복무 중이던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인류학과 민족지 연구를 접했다. 그래서 성서, 인류학, 실험과학, 사회학, 만화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와 내러티브 사이를 종횡무진한다. 그는 교수나 철학자가 되지 않았으면 라투르 와인을 판매했을지 모른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전형적인 와이너리 메종 루이 라투르를 소유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끔 “독자들이 라투르 와인에 버금가는 즐거움을 얻기 바란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유다. 그가 사물의 행위성에 대한 이론을 유머러스하게 전개해 전 세계에 공감을 얻은 것은 이런 왕성한 호기심과 다양한 배경이 펼치는 네트워크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은 그만큼 난해하기도 하다. 가장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그의 말년 대작 『존재 양식의 탐구』(2012)에서 라투르는 근대인이 추구해온 기술, 정치, 경제, 종교, 허구, 조직, 도덕, 법, 습관 등의 영역을 가로지르며 이 영역들의 존재 양식(modes of existence)을 검토한다. 이 영역들의 존재 양식이 저마다 고유하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넘어서거나 흡수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진행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그 많은 존재 양식(이 책에서 15개) 중에 ‘사회’라는 것은 없다. 엥? 사회가 없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그의 말을 찬찬히 따라가 보면 수긍이 된다. 순수하게 인간적 공동체인 사회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인간/비인간의 이종접 집합체만 있다. 그래서 그는 사회 대신에 하이브리드 한 ‘집합체’(collective)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는 사회를 독립된 하나의 실재의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 이후 사회학은 크게 잘못됐다. 사회학은 사회의 수많은 현상, 분야, 구조에 대한 사회적 설명을 제시하려 하지만, 사회적인 것 그 자체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설명되어야 한다. 지금의 소위 ‘사회현상’라고 부르는 사태를 보자.
“부의 양극화, 대량실업 사태, 환경파괴의 가속화, 동물권, 식물권의 등장,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그리고 이들 약자에 대한 혐오감의 확산, 디지털 성범죄, GMO 등 식량 문제, 냉동 배아, 센서 장착 로봇, 향정신성 의약품, 오존층 구멍, 테러와 전쟁의 일상화, 팬데믹, 인공지능(AI), 신냉전”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이 많은 문제 중에서는 사회학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우리는 화학적 반응과 정치적 반응이 끊임없이 혼합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유전자 변형 생물체(GMO)에 대한 과학적 질문을 비정부기구들의 항의와 함께 다뤄야 한다. 기후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불타는 지구와 기후 부정론자들의 끊임없는 로비를 함께 저글링 해야 한다. 그가 사회라는 용어를 싫어하는 이유는 사회가 오직 인간만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이고, 사물이 객체라는 인식도 역전된다. 인식하는 정신과 대상은 신비한 가교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자들이 지시하는 연쇄가 확장하며 누적된 결과다. 이 지시의 연쇄는 한쪽에 있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매달린 밧줄이 아니라, 뱀이다. 즉 몸이 더 길고 강해지면서 머리와 꼬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뱀이다. 뱀이 그리는 궤적, 공백, 틈새의 혼란스러움이 바로 집합체의 본질이다. 바로 이 뱀처럼 기다랗고 구불구불하며 어린왕자의 보아뱀마냥 크기가 점점 커지고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모든 지점들이 라투르가 생각하는 연결망이자 집합체이다. 마치 조향사가 코의 민감성을 향상시켜 향수 냄새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도록 향수와 더 잘 연쇄하도록 훈련받듯이, 우리도 준 객체들과 연결을 잘 감지하고, 각각의 미묘한 톤으로 반응해 좋은 공동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라투르가 근대인의 용어과 가치관을 이렇게 뒤집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 근대인이 만들었지만, 현재 암적으로 증식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라는 거주지에서 ‘생태’라는 거주지로 넘어갈 길을 찾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는 모두 그리스어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라는 어원을 공유한다. 우리는 경제로 살림해 온 지구에서 이제 거주 불능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지구라는 집을 떠날 방법은 없다. 남은 유일한 길은 합리적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하는 냉정한 개인이 아니라 복합적 하이브리드 행위소로서 무수한 대본 속에서, 이제 민감하게 집합체의 다른 행위소들과 접속할 태세를 갖추고 함께 춤추며,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생태’ 거주지로 무사히 넘어가는 일이다.

동서비교철학적 관점으로 인류세, 포스트휴먼, 사변, 가상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저서 『퇴계선생에게 배우는 삶의 리추얼』(2025),『탠저블 필로소피 : 성학십도 VR(공저)』(2020), 『블랙미러로 철학하기』(2019)와 역서 『인류세란 무엇인가』(공역, 2025) 등이 있다. 논문「사변의 두 흐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과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의 만남」,「리기론(理氣論)과 신유물론의 교차점에 대한 시론」,「식인(食人) 논쟁을 둘러싼 ‘비인간’ 개념의 확장가능성 탐구」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