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의 각본들



연사: 허윤 교수(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선의 근대문학은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아들들의 가족 로망스에서 출발한다. 조선의 청년들은 아버지와 대결할 기회를 빼앗겼다. 제국 일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버지를 제거하기는커녕 아버지와 함께 거세된다. 이광수의 초기 소설인 「사랑인가」(1909)와 「윤광호」(1918)는 제국 일본이라는 더 강력한 가부장이 외부로부터 등장한 상황에서 전근대적 아버지(기존 체제)를 해체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남성 청년의 갈등과 고통을 일종의 ‘퀴어함’으로 풀어낸다. 


해방을 맞은 남한의 남성 청년들은 미국이라는 더 강력한 아버지와 조우한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 역시 “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이 낫다”는 신념을 내건다. 이 신념에 따라 좌파를 불법화하고 좌익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군경을 중심으로 한 안보기구가 확대되고, 우익 청년단체가 조직되어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다. 갈고리와 죽창으로 설명되는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국기와 애국, 용맹이라는 남성적 가치로 추앙받았다. 


이후 한국전쟁은 전쟁의 현장인 전선을 남성이, 그 전선을 보조하는 후방을 여성이 담당하는 이분화된 구도를 고착화시킨다. 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여성들은 공론장으로 소환된 듯했지만, 여전히 주체가 아니었다. 급속히 진행된 미국화, 북한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반공주의 등 냉전체제에 종속된 남한은 사회를 통치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여성혐오를 선택했다. 


미군과 UN군을 상대로 일하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혐오는 공론장의 담론과 여러 소설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혐오는 남한과 미국의 남성 연대를 가리는 데 동원된다. 기지촌 여성에 대해 이토록 많은 혐오 발언을 생산한 한국사회는 정작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남한은 미국이 재편하는 냉전 아시아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 


박정희 체제의 초남성성은 역설적으로 주변적 남성성을 소환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전쟁에 나서는 용맹한 전사 혹은 가정을 ‘떠받치는’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초남성성은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허구이다. 가부장의 강력한 힘을 근거로 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성적 억압’의 중추 혹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식민지 제국주의, 폭압적 독재 등의 표상으로 간주되지만, 정작 어떤 남성도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모순을 내포한다. 



즉 이러한 남성성은 모든 남성 주체들이 믿고 따라야 할 표본/규범으로 제시되지만, 실제 현실에서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남성은 없다. ‘일등 시민’이란 남성 자신이 죽거나 다치는 희생을 통해 획득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성행한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는 바로 이 초남성적 시대에 요구되던 지배적 남성성에 틈과 균열을 내며 다종다양한 남성성/들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여장남자 코미디 영화는 주로 가난과 실업으로 좌절하는 남성 청년이 여성의 젠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해프닝을 그린다. 이들 캐릭터는 남성성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획득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니 산업화, 도시화의 희생자로 남성 노동자가 고향을 상실하는 서사를 다루는 것은 일부만을 확대 재생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다기한 비-헤게모니적 남성성들을 상상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