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 또는 공-동성의 문화와 사회

최 진 석(서울과학기술대학교)



 감응의 시대가 도래했다


지금 한국의 지식사회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감응(affect 感應)이라는 유령이. 정동(情動), 정서(情緖), 혹은 또 다른 단어들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감응은 스피노자-들뢰즈의 사유에서 연원하는 것으로서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감응은 정신보다 신체에 우선 작용하는 힘이며, 명석 판명한 관념보다 무의식적으로 몸에 각인되고 작동하는 감수성의 차원을 아우른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움이나 분노, 우울, 슬픔, 기쁨과 공포 등의 통상적 감정들로 환원되지 않는데, 무의식과 신체를 관류하는 힘으로서 감응은 항상 이행의 과정에서만 표현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새똥을 맞았을 때의 불쾌감과 공개석상에서 모함을 받을 때의 불쾌감이 같을 수 없다. 또한 허기질 때 밥을 먹고 느낀 쾌감과 광장에서 민주주의의 대의를 성취했을 때의 쾌감이 동일하지는 않다. 쾌감과 불쾌감이라는 언어 표현은 같을지라도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사건적으로만 정의되는 감응의 여러 가지 양태들이다.


감응에 대한 관심은 비단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들뢰즈를 빌어 말한다면,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온갖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차이의 양상들은 감응의 응결체라 할 만하다. 즉 제도나 법, 규범, 관습과 습관, 에티켓으로부터 미학적 개념과 철학사상의 체계, 그리고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혁명과 파국, 현상과 사건 속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은 감응이 현실 속에서 특정한 강도(intensity)를 이루어 표현된 ‘감응의 응결체’인 것이다. 이렇게 감응의 프리즘을 통해 개인과 사회, 일상과 삶의 본원적 차원을 다시 살펴보는 일은 근대 이후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근대를 넘어서 탈근대를 향한 감응의 흐름을 뒤좇아 정치와 사회, 문화와 예술, 혁명과 공동체의 문제들을 분석하려 한다. 코뮨주의(commune-ism)는 그 탐구의 실천적 과정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감응의 인간학과 정치학


2015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피트 닥터)을 예시해 보자.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들이다. ‘기쁨’(joy), ‘슬픔’(sadness), ‘버럭’(분노, anger), ‘소심’(공포, fear), ‘까칠’(혐오, disgust)의 다섯 가지 감정은 우리의 마음을 구성하고 일상적 기분을 규정짓는 개별 주체들로 의인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쁨이 조종간을 잡는 날은 무엇을 하든 즐겁고 상쾌하지만, 슬픔이 단독 조종에 나서는 날이면 모든 것이 먹구름이라도 낀 듯 어두운 심상의 지배를 받는다. 이 다섯 감정들은 이름이 곧 본질을 표상하며, 각자는 그 본질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예컨대 기쁨은 언제나 기쁜 느낌에만 빠져 있으며, 슬픔은 무엇을 해도 슬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감정들 역시 이름이 뜻하는 것 이외의 다른 정서적 표현은 갖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된 다섯 가지 감정은 정확히 말해 감응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들은 감응이 결정화된 단면들, 감응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포착되어 형성된 특정한 조각들이다. 어렵게 여겨진다면 조금 방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언어로 표명되는 우리의 감정 상태들은 모두 동일한가? 출근길에 머리에 새똥을 맞았을 때 느끼는 분노와 국정농단을 규탄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을 때 느끼는 분노가 똑같은 것일까? 혹은 사랑하는 연인과 막 헤어졌을 때 느낀 슬픔과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순간을 되살려 볼 때 지각되는 슬픔이 여전히 같을까? ‘분노’나 ‘슬픔’처럼 동일한 단어로 제시할 수밖에 없다 해도, 분명 그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의 강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음악의 선율이 이어지듯이, 감정은 강도의 연속적 파도를 오르내리며 잇달아 지속되는 흐름 가운데 놓인다. 이렇게 연이어지는 감정의 흐름, 미시적 느낌의 연속적 운동이 감응이다. 감응은 언어적 규정을 앞서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강도를 통해서만 지각되는 감각적인 것(the sensible)의 유동(流動)이다. 운동으로서 실재한다는 점에서 감응 자체는 셈할 수 있는 개별적 대상이 아니지만, 감응이 없다면 그 어떤 개별성도 실존할 수 없다. 요컨대 기쁨과 슬픔, 분노와 소심, 까칠 등의 개별적 감정들은 감응의 연속적 흐름으로부터 추출된 특정한 상태의 이름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감응의 흐름 가운데 실존하며, 그 같은 흐름의 연속성을 통해 서로 이어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감응은 인간학과 정치학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한편으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감응에 예속되어” 있기에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흔히 이성과 더불어 감성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공통의 감응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할 수 있기에 정치적 사회체를 구성하는 존재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 나아가 인간들의 집합체인 사회와 국가로 결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들 ‘사이에’ 감응의 흐름이라는 접속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의 유대는 이해타산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감응적 관계의 설립을 통한 연대가 필연적이다. 만일 감응을 낱낱의 개별화된 감정과 동치시킨다면, 그와 같은 집합적 연대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감응은 조각난 감정이 아니라 연속적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지속의 감각이며, 그로써 개인들의 신체를 관통하고 연관 짓는 힘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응적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사회적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성적 판단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유대에 있어서도, 감응이라는 존재 조건으로 인해 인간은 사회적 본성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사회 상태를 욕망한다.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사회 상태를 해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감응이 인간학의 기초이자 정치학의 기저를 이루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코뮨, 또는 공-동성(共動-性)의 공동체


이웃관계에 있는 무엇을 감수(感受)하는 것은 감응의 실재와 작동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각적 표상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공감각적 지각에 관련된 모든 효과를 포괄한다. 핵심은 그와 같은 감응의 이미지가 획일적인 감각 표상에 의해 박제화되지 않고, 언제나 사건의 특이성을 통해서만 체험된다는 데 있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정의상 사건은 유일무이한 일회적 발생이다. 그러나 단독자의 유아독존적 실존이 사건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것은 인접한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사건으로서의 특이성을 발산한다. 축구선수가 영예의 결승골을 넣기 위해서는 다른 열 명의 선수들이 일사분란하게 공을 패스해 주고 결정적인 슛을 날릴 만한 위치로 그를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가 결승골을 넣는 사건은 그 같은 시공간적 배치 속에서 움직이는 다른 주자들과의 협-조(協-調)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러시아어로 사건(sobytie)은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so’와 ‘존재’를 가리키는 ‘bytie’가 결합해 만들어진 단어다. 타자들이 하나의 시공간에 모여들지 않는다면, 특정한 배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응이 생산하는 효과는 타자들이 함께-있음(being-in-commune)으로 인해 유발되는 함께-함(doing-in-commune)의 사태다. 따라서 감응의 문제의식이 함께-삶(living-in-commune)이라는 정치적인 것과 연관되는 것은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노릇이다. 감응의 핵심은 ‘코뮨’에 있다. 어떻게 함께-살 것인가?


공동체는 타인들과 함께 만드는 삶의 관계다. 타인이 타인인 것은 그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며, 제 아무리 공동성을 지향하고 공동체적 지식을 함께 나눈다 해도 근본적인 타자성은 제거할 수 없다. 근대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온 수유너머가 타자성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것도 타자가 국가와 자본에 흡수되지 않는 본질적인 외부성을 갖기 때문이다. 외부성이 바로 타자성이며, 이를 옹호하고 사유하는 공동체에서 그것은 활동의 근원적인 출발점이지 않을 수 없다. 놀랍게도, 외부성과 타자성의 다른 이름은 바로 분열에 다름 아니다. 공동체적 삶을 그토록 강조하고 공동성을 가장 긴박한 의제로 내세울 때, 눈앞에서 놓치기 쉬운 것은 공동성이 곧잘 동일성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항상 화합과 조화 속에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공동체는 동일체의 위험에 가장 가까이 와있을지 모른다. 공동성(共同性)은 동일성(同一性)과 그리 멀지 않다. 그럼 다시, 공동체는 불가능할까?


외부성과 타자성을 본질적으로 포함하는 공동체. 그것은 동일체가 될 수 없다. 동시에 이는 공동체가 함께-하는 운동을 본원적으로 내포하는 집합체임을 가리킨다. 공동성은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움직임을-만드는 리듬의 연대에 다름 아니다. 공동성은 공-동성(共動-性)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특정한 조건 속에서 특정한 리듬에 맞춰 추는 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질성의 연대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타자와 함께 출 수 있는 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가락이어도 몸이 가는 대로, 손과 손을 부여잡은 몸짓으로 서로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어설프게나마 리듬과 박자를 맞추어 가는 과정, 그로부터 생겨나는 미묘한 감응의 공-동성. 그렇기에 공동성이란 분열을 내장하는 힘이며, 오직 이질성의 연대로서만 공-동체일 수 있다.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며, 거꾸로 공동체의 구성 근거에는 필연적으로 분열이 있게 마련이다. 분열의 공-동체, 우리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코뮨으로. 삶이 종결되지 않는 생명의 과정이듯, 공-동체의 운동 또한 완결될 수 없는 리듬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여기를 떠나 다른 시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과감히 욕망하기를 멈출 수 없다. 또 다른 실패를 기약하며, 그러나 실패를 언제나 감수하고 넘어서는 실험으로서 이 춤이 지속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코뮨주의, 그 불가능한 시도를 다시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