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동정, 차별, 그리고 장애


연사: 김도현 연구활동가(노들장애학궁리소)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수자 문제와 관련하여 쓰이고 있는 ‘혐오’라는 기표(記標)는 결코 간단히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지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 이데올로기가 모종의 ‘적의(hostility)’를 수반하며 표출되는 상태나 현상”이라고 폭넓게 이해해 볼 수 있으며, 장애 혐오는 여성 혐오, 인종 혐오, 동성애 혐오와 서로 연동된 양태를 드러낸다.



장애 차별의 지배적 감정은 일단 동정 내지 연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정 내지 연민과 혐오 내지 증오는 상반된 감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때때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동정과 혐오는 반대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전의 양면에 가까우며, 매우 쉽게 치환 내지 전화될 수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순간 자기혐오에 빠질 가능성도 높으며,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순간 자기연민에 빠질 가능성 역시 높다는 것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단순히 대상(객체)이 되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비체(卑/非體, abject)’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장애/비장애의 관계에서 장애는 어떤 부정성과 그에 따른 존재성 자체의 삭제에 의해 특징지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장애인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예방’(사회정책적 개입과 불임수술), ‘제거’(선별적 낙태와 안락사), ‘격리’(시설 수용), ‘되돌리기’(의료적 재활)의 대상이 되어왔다. 또한 ‘disablism’은 ‘장애차별주의’를 의미하고, ‘ableism’은 ‘비장애중심주의’를 의미한다. 즉 disablism=ableism이며, 양자 모두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규정된 채 장애(인)의 위치가 삭제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강자와 능력 있는 자는 동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약자와 무능력한 자는 ‘비(非)의식적인’ 차원에`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혐오’와 ‘능력주의’는 언뜻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양자가 하나의 보편적 감각으로 부상한 것은 삶의 불안정이 일상화되고 삶의 위험 요소가 ‘개인화’되는 시대,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적 영역이 사적 영역에 의해 식민화되는” 동일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을 영어로 ‘person with disabilities’라고 쓴다. 그렇다면 ‘비’장애인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person with abilities’, 말 그대로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이걸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부정하면 ‘person without abilities’, 즉 ‘능력 없는 사람’이 된다. ‘에이블리즘(ableism)’은 비장애중심주의 내지 장애차별주의를 뜻하지만, 그 본질은 다름 아닌 능력주의다. 요컨대 능력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장애차별주의는 사라지지 않으며, 역으로 장애차별주의를 철폐하지 않는 한 능력주의 사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킴 닐슨(Kim E. Nielsen)의 『장애의 역사』(A Disabilit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그러한 진실을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 속에서 통찰해 내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장애 혐오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장애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넘어 ‘인식의 전환’을 이룰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는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장애학의 도전』, 75쪽). 그리고 이 명제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여성학의 고전적 명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