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월례발표회
홀로코스트에 대한 ‘포스트 기억세대’의 기억문화의 위기 혹은 전환


발제: 김혜진 (HK 연구교수)


홀로코스트는 기록이 잘 남아 있는 대량 학살 사건이다. 그러나 부정, 왜곡, 경시가 자주 이슈화되는 것 또한 홀로코스트일 것이다. 물론 특정한 공적, 사적 영역에서 쇼아 Shoah, 아우슈비츠로도 불리는 홀로코스트가 불편한 주제이거나, 70여 년 전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가 던졌던 서구 문명에 대한 근본적 테제나 1961년 아렌트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사유 등 홀로코스트에 대한 담론 자체가 이미 지나간 ‘역사적’ 주제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1959년부터 ‘홀로코스트 이후의 과거 극복과 교육’을 언급한 이래로 강조해온 ‘망각에 대한 저항’에는 사회적 차원에서 아우슈비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우려와 경고를 함의하며, 특히 청산되지 않은 전후 파시즘이 반민주주의 체제의 나치즘보다 잠재적으로 더 위협적일 거라는 그의 진단의 탁월함은 아도르노 사후 50년이 지난 오늘날, 더이상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극우적 혐오문화가 입증하고 있다. 


현대사회를 증오가 증식하는 ‘혐오 사회’로 규정한 카롤린 엠케는 아도르노의 망각에 대한 저항을 정의의 문제로 치환하여 ‘범죄에 대한 침묵은 학살자들과 불의의 궁극적인 승리다’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특히 홀로코스트 기념비와 추모관과 같은 독일의 제도적인 기억문화가 포스트-기억세대에게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나 관광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억문화정책을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는 망각의 전략으로 보는 리오타르와 집단 기억 뒤에는 상징과 기호의 잔재만 남아 있더라는 노라의 분석과도 어느 정도 맥락을 같이 한다. 독일의 기억문화에 대한 날 선 엠케의 비판은 신뢰성 문제로 쟁점화되곤 하는 생존자 기억과 진술의 불안정성, 그런 생존자의 기억이 전승된 - 혈연으로 묶여 있거나 그렇지 않은 제3 자를 포함한 – 포스트 기억세대 작품의 불확실성, 혹은 사료적 역사와 다른 부분들에서 오히려, ‘수정될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 객관과 주관의 논리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항변이다. 


기억이 주관적이고 왜곡되었다고 판단하기 이전에, 왜곡과 침묵을 작동시키는 생존자의 트라우마와 그 트라우마의 기원을 보다 복합적으로 성찰하려 할 때, 증오의 기원과 저항, 전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연대도 가능하다는 전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있다는 전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억의 위기로 불리는 이러한 ‘주관적 사실성’ 혹은 ‘왜곡된 기억의 진실성’의 필요성은 단적으로 기억문화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베를린의 기억 장소 즉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사진 참조)이 반증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도화된 기념물의 정식 명칭에는 앞서 적시된 바와 같이 가해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후 세대에게 이 기념물이 유대인이 피해자라는 영원한 낙인으로만 각인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